만 36세, 권고사직을 당했다. 집에 있기 뭐해서 근처 역 주변 카페로 첫 출근했다.
2012년부터 안정적인 중견기업에서 10년 가까이 일하다가 반복적이고 의사결정이 느린 답답함에 2021년 말 스타트업으로 이직했고 만 2년이 되는 시점에 권고사직을 당하게 되었다.
스타트업에 오면서 의욕이 넘쳤다.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 많았고 젊은 혈기(?)로 으쌰으쌰 하는게 좋았다. 처음으로 팀장이라는 직책도 맡게 되면서 주말, 야근 없이 나를 갈아넣었다. 시장 분위기가 좋아 회사도 투자를 잘 받아왔고 업무도 빠르고 공격적으로 임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22년 하반기부터 시장 분위기가 바꼈다. 전 세계적으로 투자가 위축됐고 설상가상으로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발발하면서 앞으로의 경제 전망을 하기가 어려워졌다. 회사도 예정된 투자를 받지 못하게 되면서 그동안 묵혀왔던 실상이 드러나게 된 것 같다. 무리한 사업 확장에 대한 대비가 부족했고 아직 흑자 전환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금 지급조차 할 수 없었다. 2023년 1월, 대규모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전사적으로 40% 가량이 권고사직으로 퇴사하게 되었고 열심히 일하던 팀원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아마 이 때 부터 나도 패닉과 의욕상실이 시작된 것 같다.
스타트업으로 이직하기 직전에 나의 결정을 만류하던 동료분이 있었다. 당시엔 그 조언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은 무슨 의미였는지 확실하게 알 것 같다. 하지만 이직했던 것을 후회하진 않는다. 그대로 있었다면 매일 답답함을 얘기하면서 우물 안 개구리가 되었거나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긴 했을 것 같다.
진행중이던 큰 프로젝트가 있었다. 시작할 때 부터 협력사의 주먹구구식 운영과 비협조적인 태도가 불안했다. 지금 중요한건 이게 아니라 내실을 다지는 것이라고 어필했다. 기존에도 내부 프로세스가 체계적이지 못했고 여기서 발생하는 비효율과 비용손실이 크게 느껴졌다. 그러나 스타트업 특성 상 투자를 이어가려면 투자자를 납득시킬 수 있는 회사의 비전과 확장이 더 중요했고 어쩔 수 없이 프로젝트를 우선순위로 두고 업무를 진행했다. 1년 가까이 준비해왔지만 완료 임박한 시점에 투자경색으로 회사의 모든 업무가 스탑되었고 담당 본부장이 퇴사했다. 같이 프로젝트 진행하던 협력사의 직원들까지 줄줄이 퇴사하면서 정상적으로 완료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내가 있던 팀은 담당 본부장이 없는 상태로 2개월을 보냈다. 계획했던 업무들이 다 무너졌고 당연히 회사는 손실을 그대로 떠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책임은 이 프로젝트에 포함되어 있던 인원들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회사는 이익단체 이고 자원봉사자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당연히 힘든 상황 속에서도 성과를 냈어야 했고 나도 그 프로젝트 안에서 문제가 되지 않게끔 했어야 하는게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과가 안좋았고 나를 제외하고 프로젝트에 관여했던 인원 모두가 뒤숭숭한 분위기와 언제 다시 재개될지 모른다는 불안함으로 이직했다. 나도 오픈 직전인 중요한 순간에 퇴사하고 싶다는 의견을 낸 적이 있었다. 비겁하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남아있던 팀원도 있고 어떻게 마무리가 되든 끝까지는 있어야 겠다고 생각되어 다시 열심히 해보겠다고 번복했다. 다시 맘 잡고 나름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봤지만 결국 이런 상황이 되었다.
분위기 상 느껴지는게 있긴 했지만 실제로 권고사직 제안을 받았을 땐 해머로 머릴 맞은 듯한 느낌이었고 마음이 상해서 내 의지로 사직서를 쓸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회사에서 강제로 해고할 순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배째라 였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면서 감정을 최대한 제거하고 냉정하게 다시 생각해봤다. 아마도 회사 입장에서는 회사 운영을 지속하기 위해선 투자자들에게 그럴듯한 이유로 설명하는게 필요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상컨데 '기존에 프로젝트 참여했던 인원들이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던 것이고 그 인원들을 전부 정리했다. 한명 남았는데 곧 정리될 예정이다. 제대로 정비하고 있으니 한번 더 기회를 달라.' 이지 않을까. 회사에 딸려 있는 직원들도 많고 본부장급의 상급자 분들도 일반 근로자와 크게 다르지 않는데 어쨌든 회사와 자신들의 경제활동을 이어가기 위해선 제일 좋은 선택지가 '내'가 되었던 것이다. 이해는 된다. 하지만 진척상황을 매 주 보고하면서 힘든 상황임을 몇번씩 얘기해왔는데 '그럼 당신들은 그동안 뭐했나?' 라는 생각이 계속 드는 것은 어쩔수가 없다.
퇴사 조건에 대해 협의하면서 자세히 밝힐수는 없지만 나름 배려하는 조건들을 제시해주었다. 당장 다른 곳에 취업이 될 수 있을지 막막하지만 지난주 금요일까지의 출근을 마지막으로 마무리 했다. 인수인계까지 제대로 안하고 나갔다는 말을 듣긴 싫어서 열심히 알려주고 나왔다. 사실, 이런 상황이면 바로 다음날 부터 출근하지 않았어도 회사에서 뭐라 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마음 추스리면서 집에도 얘기하고 하는 시간이 필요해서 일부로 더 출근한 것도 있다.
여기까지는 하소연이었고 이제는 잡념을 훌훌 털어버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가 중요하다. 오히려 지금, 젊은 나이에 이런 경험을 해봤다는 것을 더 큰 자산으로 삼으려 한다.
다행이 지난달 부터 이력서 제출했던 곳에서 면접도 두세차례 봤고 이번주에도 면접 예정인 곳이 있다. 11월 말에 자격증 시험 접수 해놓은 것도 있어서 당장은 이 준비부터 열심히 해봐야겠다. 오늘은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야 겠다.
당분간은 그간 미뤄왔던 블로그 활동을 재개하는 의미로 일 1회 글 작성하기를 해보려 한다. 권고사직과 취업활동 관련된 글들은 기존 직장에서의 권고사직 조건도 있고 이직이 확정될 때까지는 비공개로 등록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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